위대한 (혹은 작지만 소중한) 유산

베르사유에서 알게 된 프랑스인 친구 M씨는 무척 낡은... 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거의 다 썩어 가는 빨간색 폭스바겐 골프를 타고 다닙니다. 본인은 프랑스 유수의 정유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고(프랑스는 엔지니어를 우대하는 나라입니다 정관계나 재계에도 이공계 출신 고위직이 상당히 많구요) 아버지는 고향인 브르따뉴(프랑스 서북쪽 지방... 노르망디 지방의 서쪽이라고 보면 됩니다)에서 편안하게 연금 생활하고 있고 누나는 뉴욕에서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합니다. 프랑스 기준으로 봐도 경제적으로 비교적 윤택한 편인 그가 왜 굳이 이렇게 낡은 차를 고집스럽게 타고 다니는 걸까요. 해마다 들어 가는 수리비만 해도 이미 오래 전에 차값을 훌쩍 넘어섰을텐데 말이죠. 이유를 물어 봤습니다. 돌아 가신 할아버지가 자신이 대학 입학할 때 선물로 사준 차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다는 군요. 더 이상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는 타고 다닐 작정이라고 합니다. (M씨는 40대 초반이니까, 벌써 20년이 넘은 차라는 얘기입니다)

M씨의 경우 외에도, 프랑스 인들 중에는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소중한 뭔가를 자신의 보물 1호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쓰던 펜이라든지, 할머니가 물려준 (값비싼 보석은 아니지만) 예쁜 장신구라든지, 몇대를 걸쳐 조금씩 고쳐 가며 쓰고 있는 가구라든지. 이 사람들이 생활하는 방식이나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낡고 오래돼서 사용하기에 불편한 것들이라 해도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기에 함부로 대하지 않고 가급적이면 고쳐서 사용하려고 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거니와,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구요. 파리는 물론이거니와 지방 어느 소도시를 가도 항상 볼 수 있는 오래된 문화재들은, 그 자체로 원래 만들어질 당시부터 훌륭하기도 했지만, 후손들이 끊임없이 소중하게 보존해 왔기에 세월이 지날 수록 오히려 그 가치를 더해가고 있는 거지요.

우리의 경우를 돌아본다면,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부터 가진 것이 빈약하기도 했지만 그나마도 일제 강점기니 전쟁이니를 거치면서 거의 대부분 파괴되어 버렸고, 한줌 남아 있는 것들조차 무분별한 개발 경쟁 속에 사라져 가고 있지요. 과거야 그렇다치고,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은 어떤가요. 여러분이 일상 속에서 소중히 사용하고 있는 것들 중에, 조상이나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들이 있는지요. 혹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물건 중에 이건 자식들이나 후손에게도 물려주고 싶다라고 다짐하면서 쓰고 있는 것들이 있는지요. 아니 그런거 다 떠나서 뭔가 소중한 것을 갖고 있기는 하신지요. 자동차는 5년만 지나면 똥차 취급을 받고 10년 넘기는 차를 보기가 힘들지요. 아파트를 비롯한 건물들은 20년 후에는 재건축을 할 것을 염두에 두고 짓기 때문에 그 이상의 내구성이나 역사적 가치는 애시당초 고려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요.

저 자신을 돌아봐도,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뭔가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아이가 나중에 커서 내가 쓰던 것을 물려 받아 쓸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려 합니다.

Posted by vincent

2010/01/07 03:42 2010/01/07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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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oundboy 2010/01/07 12:01 # M/D Reply Permalink

    용산 참사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번에 종로에 명물거리였던 피마골도 불도저로 다 밀어버렸더군요. 외관이 보기 안좋다구요. 이명박, 오세훈으로 이어지는 한나라당 서울시장들이 말하는 '디자인 서울'의 본질이 무엇인지 의심스럽기만하네요.

    1. vincent 2010/01/07 20:57 # M/D Permalink

      이곳에 와서 바뀐 생각 중 하나는 문제가 좀더 근본적인데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에요... 물론 이명박 오세훈은 문제지만 결국 그들에게 권력을 안겨 준건 다름아닌 우리거든요. (물론 저는 그들에게 투표하지 않았지만) 정작 우리는 얼마나 피맛골을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피맛골 상인들은 얼마나 그 거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결국 이명박이란 괴물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감춰져 있던 저열한 욕망의 총체가 권력자의 형태로 형상화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인 거죠.

  2. Sol 2010/01/07 23:39 # M/D Reply Permalink

    마음속 한켠을 뜨금하게 만드는 거네요. 자동차, 가구, 책, 전자제품, 옷 등 뭐든 새로운게 좋아져 버리는 제 자신. 살고 있는 아파트도 그렇구요. 반성 중...^^

    1. vincent 2010/01/08 18:54 # M/D Permalink

      네 잘못 아니니까 반성할 필요까지는 없다만, 지금부터라도 나중에 도아가 학교 졸업할 때 혹은 시집갈 때 '이건 엄마 아빠가 오래도록 유용하게 사용해온 건데 이제부턴 네가 써라'고 말하며 전해줄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는게 어떨까? 그런 마음 가짐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유행이나 가격표 따위가 아닌 그 물건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가치를 볼 수 있는 안목이 길러지지 않을까 한다.

  3. Bloodlust 2010/01/09 10:31 # M/D Reply Permalink

    전 지금 타고 있는 두카티 몬스터를 그렇게 오래오래 아껴주고 싶습니다만...

    1. vincent 2010/01/09 19:12 # M/D Permalink

      아 그거 딱 좋네요. 2~30년 후에는 지금의 날렵한 디자인이 굉장히 클래식하게 받아들여질 거에요. 물론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굉장히 아껴줘야 하고, 웬만한 고장은 스스로 고칠 수 있을 정도로 준비해 둬야 할 거구요.

    2. Bloodlust 2010/01/10 08:19 # M/D Permalink

      사실 그 디자인은 15년이 넘은 디자인임미다. ㅎㅎ 지금은 모델 체인지가 돼서 같은 이름으로 다른 디자인의 몬스터가 나왔기에 벌써 클래식의 반열에 접어들었죠.

  4. kikig 2010/01/15 09:15 # M/D Reply Permalink

    제 영국인친구도 남편의 할머니가 손자(제친구의남편)에게 "프로포즈"할때 네 짝에게 주라고한 반지를 웨딩링으로 하고 다녔는데 얼마전에 잃어버렸다고 며칠째 울상입니다.

    제 아버지는 저 어렸을때만해도 10살? '황학동 풍물시장에 절 끌고가서 아빠가 어렸을때 쓰던거랑 똑같구나 하시면서 맨날 이것저것 사가지고 집에 오셨는데 집 한구석에 아직도 남아있네요. 그 황학동시장은 엠비의 정권이후에도 살아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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